극단적인 사상이 사회를 삼키는 과정
2018-07-12 12:50:47 (7년 전)
사상 최악의 대학살을 저지른 독재자 히틀러는,
민주공화국 체제에서 어떻게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요?
그의 끔찍한 음모의 시작은 제1차 세계대전 말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 8년, 연합군이 승기를 잡으면서 독일은 끝내
자신들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맞물려 제정을 무너뜨리고자하는 독일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불안정한 정세가 온 나라를 뒤덮었고,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공산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독일의 주요 정당들은 폭동의 기운을 억누르고자
의회 정치를 바탕으로 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세워 나라를 재정비해나갔습니다.
갓 태어난 공화국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업은 바로,
승전국과 맺은 평화협정의 내용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패전으로 국토의 10%를 빼앗기고, 군대는 사실상 와해된 마당에
독일은 전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막대한 보상금을 부과 받음으로써
국가 경제는 사실상 재기 불능 상태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국수주의자들과 1차 대전 참전군인들에겐
무너져가는 조국의 몰골이 수치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인들과 시위대만 아니었어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시기 모습을 드러낸 히틀러는 그러한 착각을 집착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편견과 망상에 따른 비난의 화살을
유대인들에게로 돌렸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독일 사회의 적지 않은 반(反)유대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독일 사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삶을 꾸리고 있었지만,
절대 다수의 독일인들은 여전히 그들을 외부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종전 이후 독일 국민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공포와 분노,
그리고 분별력 없는 편견은, 사회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유대인들에 대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다’거나 ‘전쟁으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는 식으로
오명을 씌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오명은 어디까지나 의혹에 불과했지만,
히틀러는 의혹을 진실로 꾸미면서 정치적 이득을 톡톡히 챙겼습니다.
국수주의 정당을 끼고 어릿광대처럼 대중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히틀러.
근거 없는 선전으로 가득한 연설로 유세를 이어가던 그는
결국 당 지도부의 자리를 꿰차게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민중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반유대주의 정서와 대중적인 분노를 결합하여,
히틀러의 나치당은 공산주의는 물론 자본주의까지 부정하며
이러한 사상들은 바로 독일을 무너뜨리기 위해 유대민족이 꾸민
전 세계적인 규모를 가진 음모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나치당이 처음부터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국가 전복 음모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당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었고,
히틀러는 이에 따라 반역죄로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옥중에서도 시들지 않았고
히틀러는 출소를 앞두고 나치당 재건과 국수주의 운동을 착실하게 준비해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1929년,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쳤습니다.
미국 금융계는 서둘러 전 세계로부터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으며,
종전 이후 힘겹게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독일 경제는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히틀러는 또 다시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하기로 했고,
국민들에게 독일 경제의 부흥을 약속했습니다.
반면에 주요 정당들은 국가 존망이 걸린 위기 앞에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고
스스로가 대안이라고 내세웠던 다른 정치 집단들도
내부 분열로 삐걱거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한 대중들이 히틀러 앞에 모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실제로 독일 선거에서 나치당의 득표율은 2년 사이에
전체 3%에서 무려 18%까지 치솟았습니다.
여세를 몰아가던 중에 다가온 1932년 대선,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자리에 출마하였습니다.
승리는 전쟁 영웅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넘어갔지만,
히틀러는 무려 36%의 득표율을 얻어내며
자신이 떠오르는 대세임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결국 이듬해인 1933년, 그의 인기를 실감하며
그가 가진 지지세를 이용하고자 했던
대자본가 세력과 프로이센 귀족들의 조언에 따라
대통령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독일 수상으로 지명하게 됩니다.
수상으로서 히틀러는 명목상 의회 수장에 불과했지만,
그는 조금씩 자신의 권세를 드높여가며
공화국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지지자들은 준군사단체를 조직하여
곳곳에서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해나갔습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가 가진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면서
오직 자신과 나치당만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내세웠습니다.
처음부터 선동과 날조로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며
자신의 권력을 키워온 히틀러는,
마지막 승리의 순간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히틀러가 수상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933년 어느 날,
한 젊은 청년이 독일 의사당에 불을 지른 혐의로 붙잡혔습니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로 하여금
자신에게 비상 지휘권을 넘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출판의 자유가 사실상 철폐되었고,
나치당이 아닌 다른 정당들의 활동은 억압받기 시작하였으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인 법안들이 하나둘 통과되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당의 정치적인 라이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초기부터 그들을 따라 행동해온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들마저도
체포되거나 사형집행을 면치 못했습니다.
1934년,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고, 이후로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더 이상 민주적인 선거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처음부터 탄압과 억압으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자극적인 언행으로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두려움을 일깨우며 그들을
자신과 나치당이 사로잡을 절대 권력의 밑거름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대중의 시선을 의식한 지식인들과 자본가들도
점차 히틀러를 지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히틀러의 난동이 선전용에 불과하다는 안일한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만들어낸 이 역사는,
대중의 편견과 분노, 그리고 민주주의의 허점을 이용하여
권력을 차지하고 반대 의견이 탄압받으며
극단적인 사상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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