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가 잘못됐을까, 잔디가 잘못됐을까?
2017-09-01 15:41:26 (7년 전)
대한민국이 스포츠 분야에서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주제, 경우의 수. 신태용호도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부임 후부터 결과를 가장 강조했던 신태용 감독이 그 최우선 목표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31일 이란과의 월드컵 최종예선 9차전에서 한국은 최상의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 위기 앞에서 축구 팬들과 국민들은 똘똘 뭉쳤다. 4년 만에 A매치에 6만 명이 넘는 관중이 운집해 열기와 함성을 쏟아냈다. 붉은 물결로 가득 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본선행에 성공했다면 지난 1년 가까이 한국 축구를 괴롭힌 위기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었다. 축제를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였다. 신태용 감독 입장에서도 A대표팀 감독 데뷔전에서 일거에 목표를 달성하며 월드컵 본선까지 리더십을 공고히 할 기회였다.
이란전에서 본선행을 확정 지을 수 있는 확률은 현실적으로 낮았다. 우리가 이란을 잡아도, 중국이 우즈베키스탄을 잡아줘야 하는 조건이 함께여야 했다. 대부분이 전자는 달성돼도 후자가 가능성이 작다고 말했다. 중국은 A조 최하위였고 8경기에서 1승밖에 거두지 못하던 터였다.
하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이었다. 현실은 반대였다. 중국이 우한에서 우즈베키스탄을 잡아줄 때 한국은 이란과 득점 없는 무승부에 그쳤다. 중국의 특급 도움을 스스로 걷어찬 꼴이 됐다. 우즈베키스탄 외에 시리아에까지 강력한 동기부여를 심어주며 추격자가 늘었다는 것이 위협이다. 카타르를 3-1로 완파하고 조 3위로 오른 시리아는 이란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 승점 2점 차로 앞서 있는 한국을 제치고 월드컵 본선에 나가겠다는 의지로 충만하다.
신태용호에게는 분명 기회가 남았다.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승리하면 본선행은 확정이다. 무승부가 되어도 이란이 홈에서 시리아에 패하지만 않으면 2위는 한국의 차지다. 그런데 이 경우의 수를 불안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이란전에서 희망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 희망의 이름이 경기력과 내용이었다.
이란전에서 새로운 감독과 함께 한 대표팀이 보여준 것은 최종예선에서 실망의 연속이었던 전임 감독 시절보다 극적으로 개선됐다고 보기 어려웠다. 신태용 축구에 가장 기대했던 빌드업의 향상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결정적인 득점 찬스는 전반 세트피스 전략으로 만든 장현수의 헤딩 슛이 유일했다. 그 세트피스만큼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잘 준비됐다. 그러나 그 뒤 70분 동안 그런 탄성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후반 추가시간 이동국의 중거리 슛이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관중석에서 박수가 나온 것은 이전엔 시도도 하지 않는 답답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기소집을 동원해 신태용 감독과 선수들이 갈고 닦았던 간격 유지, 공간 장악, 전방 압박의 효과도 찾기 어려웠다. 수비 조직력 향상에 가장 집중했다던 신태용 감독의 설명과 달리 실제 경기에서는 수비에서의 잦은 볼 간수 실패와 킥 실수로 보는 이들을 수차례 놀라게 했다. 득점에 가까운 상황은 많지 않았지만, 한국 수비를 흔드는 방식과 페널티박스 부근에서의 기백, 위협은 이란이 더 많았다. 한국의 수비 완성도가 높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교체 타이밍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선수 교체는 준비된 시나리오와 상황에 의한 즉흥적 판단이 혼재하는데 신태용 감독의 교체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선수 보호 차원에서 한 두 번째 교체(김민재->김주영)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후반 43분에 마지막 교체 카드로 이동국을 쓴 것은 수적 우위를 살릴 공격적이고, 과감한 판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란전에서 신태용 감독이 원했다는 그 결과의 일차적 의미가 무실점이었을까? 경기 운영과 교체 방향성 등으로 종합할 때 그렇게 느껴졌다. 유효슈팅 0에 가려진 면이 있지만, 무실점은 소기의 성과다. 지난 8경기에서 10실점을 허용한 한국은 A조에서 수비가 가장 나쁜 팀이었다. 현재 아시아에서 개인 기술, 조직력, 감독의 능력까지 가장 높은 레벨에 올라 있는 이란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되돌릴 수 없는 패배를 안겨 줄 수 있는 상대다.
그래도 한국이 어느 때보다 이길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도 그 1골을 만들지 못해 최종예선에 점을 찍지 못한 것은 아쉽다. 조기 확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건 손해다.
경기 후 선수들은 공통으로 준비한 것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를 남겼다. 패턴 플레이와 부분 전술이 있었는데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온 다음 이야기가 잔디 상태였다. 엉망인 잔디 위에서 기본적인 패스조차 어려워 플레이에 지장을 받았다고 했다. 손흥민의 지적은 그중에서도 가장 직설적이었다.
"솔직히 좀 화가 난다. 매번 이런 상황에서 경기를 잘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욕심인 것 같다. 축구 하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경기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런 잔디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못 한다는 게 너무 아쉽다. 나는 훈련할 때부터 화가 났다.”
결과론에만 기댄 잔디 탓은 아니다. 선수들의 입장을 100% 옹호하는 쪽도 아니다. 이란도 같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상대성은 있다. 이란은 손흥민, 황희찬, 권창훈처럼 방향 전환을 이용하는 드리블을 하는 선수가 적다. 신태용 감독이 공격에 배치한 선수들은 거기 약점을 보였다. 경기를 만들어야 하는 이재성, 구자철은 빌드업이 두려워 공을 깔아서 주지 못했다. 이란처럼 최대한 빠르게 위험 지역으로 공을 보내 상대와 엉키며 실수를 유발하려는 영리한 운영도 없었다.
그래도 언급하고 싶은 건 지난 수년간 한국 축구의 내재한 문제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불거져 나왔기 때문이다. 상대도 같은 조건에서 한다는 이유가 핑계가 돼선 안 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놔둬야 하는 명분이 돼서도 안 된다. 서울월드컵경기장뿐만이 아니다. 지난 3년 이내에 경기장을 몇 달씩 사용하지 않는 극단적 상황을 만들며 대대적 보수를 한 곳이 아니면 지금 한국에서 축구에 사용되는 대다수 경기장은 상태가 대동소이하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만 한다’는 논리는 그럴싸하지만 붓과 연장이 제 역할도 못 할 정도로 엉망이면 도리가 없다. 잔디 상태를 극적으로 개선하는 데는 최소 2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 고온다습의 정도가 더 높아진 한국의 혹서기에는 3개월 동안 철저히 관리해야 최상의 상태를 제공할 수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잔디 상태의 문제가 거론되고 본격적인 관리를 한 것은 2주도 채 되지 않는다. 대표팀으로 인한 관심이 쏠리자 요행으로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바꿨지만 5분도 되지 않아 잔디는 실체를 드러냈다.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국내 경기장 잔디는 이제 대표팀의 승패와 관계없이, 영향력 있는 선수들의 푸념과 상관없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대책을 논의해야 할 문제다.
이란전 앞에 붙던 운명의 일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부라는 타이틀은 이제 닷새 뒤 열릴 우즈베키스탄전으로 옮겨간다. 걱정되는 건 경기를 치르기까지의 분위기 형성이다. 원정인 만큼 선수들이 느끼는 분위기의 압박은 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란전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과 불안은 수십 명의 미디어를 통해 전달 될 수 있다.
이란전의 내용도 문제지만 그 뒤 인터뷰에서 논란이 된 발언이 팬심을 끓게 만든 것은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6만 명이 넘는 대관중이 모여 원정팀을 분위기로 압박해 달라고 요청했던 건 다름 아닌 감독과 선수들이었다. 팬들은 약속을 지켰지만, 선수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 실망감은 이제 오직 우즈베키스탄전 결과와 본선 진출만으로 보상해 줄 수 있다.
신태용 감독은 여론에 휘둘리기보다 뚝심 있게 나가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부끄럽지만 우즈베키스탄전이 펼쳐지는 분요드코르 스타디움의 잔디 상태는 서울월드컵경기장보다 훨씬 양호하다. 좋은 상태의 잔디 위에서 준비했던 패턴 플레이와 조직력을 발휘해 한국 이상으로 경기력이 불안한 우즈베키스탄을 이기는 것. 그것만이 결코 지난 열흘간 대표팀의 준비가 잘못되지 않았고, 잔디 관리 문제가 홈팀의 경기력에 악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게 할 것이다. 월드컵 본선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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