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이길 수 없는 배구’를 위해 역대 최고의 외인 레오를 내친 OK저축은행 오기노
2025-03-17 11:43:55 (1달 전)

남자 프로배구 OK저축은행은 지난 시즌을 앞두고 일본 국가대표 출신의 오기노 마사지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했다. 2013~2014시즌 창단 때 김세진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2019~2020시즌부터 사령탑을 맡은 석진욱(現 KBSN스포츠 해설위원) 감독과의 결별했다. OK 저축은행의 ‘김세진-석진욱’ 시대는 10년으로 막을 내렸다.
오기노 감독은 취임 후 서브 범실 최소화, 블로킹과 수비 강조, 다양한 공격 옵션을 활용하는 토털배구를 이식하겠노라 천명했다. 이는 곧 OK저축은행의 가장 큰 강점인 V리그 역대 최고 외인 레오와의 트러블로 이어졌다. 레오는 과거 삼성화재 시절에 한 경기에 무려 77%의 공격 점유율을 가져갈 정도로 공격에 대한 욕심이 많은 스타일이지만, 오기노는 레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지나치게 꺼렸다.

지난 시즌 3라운드에 레오의 공격 점유율을 확 낮추자 6전 전패를 당한 오기노 감독은 4라운드부터 레오에 대한 공격 점유율 제한을 없앴다. OK저축은행 내에서 유일하게 믿을만한 공격옵션이었던 레오가 팀 공격의 절반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을 때려내자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4라운드 전승으로 분위기를 탄 OK저축은행은 정규리그 3위로 2020~2021시즌 이후 세 시즌만에 봄 배구에 복귀했다. 봄 배구에서도 레오를 앞세워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침없이 통과했다. 대한항공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레오가 다소 지친 기색을 보이면서 3전 전패로 준우승에 그쳤지만, 열세인 전력 속에서 챔프전 진출을 이끈 오기노 감독에게 ‘오기노 매직’이란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오기노 매직’은 한 시즌 만에 레오라는 ‘절대자’에 의존한 결과라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은 허상임이 드러났다.
오기노 감독은 지난 시즌을 마치고 구단 프런트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레오와의 재계약 포기를 선언했다. 자신의 배구철학 실현을 위해선 레오의 존재는 방해가 될 뿐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챔프전 준우승으로 인해 트라이아웃 지명권 추첨을 위한 구슬 개수도 두 번째로 적은데, 레오보다 더 좋은 선수를 뽑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오기노 감독은 무리하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다.
트라이아웃 시장에 다시 나온 레오는 2순위로 현대캐피탈에 합류했다. 대한항공에 버금가는 토종 선수층을 보유한 현대캐피탈에 ‘넝쿨째 거저 굴러들어온 복덩이’ 레오의 합류는 그야말로 ‘천군만마’, ‘화룡점정’이나 다름 없었다. 레오-허수봉의 ‘쌍포’는 시즌 초반부터 V리그 코트를 초토화시켰고, 30경기 만에 일찌감치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지었다.

레오와의 결별을 택한 OK저축은행은? 이렇다 할 장점은 찾아볼 수 없는 ‘무색무취’의 배구로 성적은 최하위로 곤두박질쳤다. 17일 기준 7승28패, 승점 27. 1경기를 남겨두고 있지만, 일찌감치 시즌 최하위가 확정됐다. 두 자릿수 승수도 올리지 못한 역대 최악의 팀으로 기억될 전망이다.
레오는 2021~2022시즌부터 OK저축은행에서 뛰었으니 오기노 감독이 고른 선수가 아니다. 지난해 5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트라이아웃이 오기노 감독의 시험대였다. 결과는? 대참사에 가까운 실패였다. 오기노 감독이 직접 뽑은 마누엘 루코니(이탈리아)는 시즌 초반 5경기에서 단 29점, 공격 성공률 35.29%에 그친 뒤 기량 미달로 퇴출됐다. 루코니 대신 데려온 크리스(폴란드)도 30경기 220점, 경기당 평균 10점도 내지 못하는 빈곤한 득점력으로 ‘폭망’했다.


오기노 감독의 배구철학을 대표하는 기조인 ‘범실 없는 서브’도 현대 배구 트렌드에는 전혀 맞지 않는 전술이다. 범실을 줄이기 위해 위력을 낮춘 OK저축은행의 ‘물서브’를 받은 상대팀들은 쉽게 받아올려 다양한 공격 옵션으로 OK저축은행 코트를 폭격했다. 17일 기준 OK저축은행의 서브 범실은 292개로 가장 적다. 서브 최소 범실 2위인 삼성화재(426개)와 비교해도 100개 이상이 적은 수치다. 그러나 이는 전혀 OK저축은행의 성적 향상에 도움 되지 않았다.
정규리그 1~3위인 현대캐피탈, KB손해보험, 대한항공이 팀 서브득점 1~3위에 올라있다는 것은 오기노 감독의 배구가 틀렸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팀 공격 성공률이 30% 후반대~40% 초중반을 오가는 여자배구와는 달리 남자배구는 리시브가 잘 되면 50%를 훌쩍 넘는 공격 성공률을 보인다. 이는 곧 범실을 감수하더라도 서브 득점을 노리고, 서브 득점이 되지 않더라도 최대한 상대 리시브를 흔들어 편하게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인 배구라는 얘기다. 오기노 감독은 수동적인 배구로 일관하다 처참한 결과를 받아든 것이다.
오기노 감독은 범실을 줄이기 위해 위력이 떨어지는 서브의 반대급부인 상대의 강한 공격을 블로킹과 수비로 제어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OK저축은행의 팀 블로킹은 세트당 2.313개로 최하위다. OK저축은행 선수들의 블로킹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그 이유일 수 있지만, 시스템 자체의 문제인 게 더 크다. 상대가 쉽게 리시브를 받아 속공이나 퀵오픈 등 확률 높은 공격 옵션을 구사하니 제 아무리 블로커들의 개인 기량이 뛰어나도 OK저축은행의 시스템 속에서는 블로킹 확률은 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수비는 괜찮았다. 디그는 세트당 11.522개로 1위에 올랐지만, 상대 공격을 백날 받아 올려봐야 뭐하나. ‘무늬만 외인’인 최약체 공격수를 보유한 OK저축은행은 공격종합, 오픈, 속공, 퀵오픈 등 대부분의 공격지표에서 최하위였다. 그나마 최하위를 면한 시간차는 남자 배구에선 거의 활용되지 않는 공격옵션인 데다 이마저도 6위로 최하위의 한 계단 위였다. 후위 공격 역시도 6위로 최하위를 간신히 면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수비로 걷어 올린다 한들 반격 과정에서의 공격 성공률이 떨어지니 OK저축은행은 상대를 이길 래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배구를 한 셈이다.
게다가 시즌 중반 보여준 외국인 선수 운영도 이상했다. 아시아쿼터 아웃사이드 히터 장빙롱(중국)이 발가락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자 그 자리에 세터인 쇼타(일본)를 데려왔다. 가뜩이나 공격수가 약한 팀인데다 이미 팀 내에 세터가 4명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세터란 포지션이 하루아침에 공격수들과 호흡을 맞출 수 없는데, 세터를 데려오는 이해할 수 없는 운영을 선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미 현대 배구에서는 사장화된 배구 철학을 구현하겠다고 V리그 역대 최고의 외인과의 재계약을 포기하는 ‘오판’으로 팀 성적을 추락시켜놓고도 오기노 감독은 남은 계약 기간인 내년 시즌까지 사령탑 자리를 유지할 마음인가 보다. 감독에게 많은 연봉에 절대적인 권한을 주는 이유는 성적이 부진했을 때 책임을 지라는 얘기다. 그런데 오기노 감독은 자신의 배구철학을 실현하겠다는 ‘권리’만 누리고, 성적 추락을 책임질 ‘의무’는 애써 외면하며 인터뷰를 통해 내년 시즌 구상을 밝히고 있다. 최소 직무유기, 최대 무능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놓고 말이다. 레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오기노에게 과연 OK저축은행은 내년 시즌까지 팀 운영을 맡기는 우를 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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